2020.2.29 토요일
어제 내 세상이 무너졌어.
뻥이구.
어제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인해 기다리고 기다리던 콘서트가 취소되었어. 난 3월 중순 쯤에 이 콜록대는 역병이 잦아들 거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어. 하지만 틀렸어. 사이비 교도들의 수가 예상보다 많았고 질병관리본부에 거짓말을 한 놈들도 있었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취소되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 화가 날 것 같았지만 화보다는... 슬펐고 슬픈 기분보다는 무덤덤했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래야 했으니까. 어차피 티케팅은 실패해서 추첨제로 뽑힌 마지막 날만 보러 갈 수 있었어. 참 운도 없지. 그래서 그냥 집착하기보다는 놓아주자고 스스로에게 타협하자고 되뇄어.
그저께 주문한 사진첩 두 권이 왔어. 그저께 보물상자를 뒤적이니 2015년 10월? 11월? 아무튼 화양연화 pt.2 콘서트 후에 열렸던 Butterfly 어쩌구 전시에서 구입한 굿즈가 나왔어. 사진들이었어. 내가 그 전시를 간 게 전시 시작한 당일의 2번째? 3번째 오픈 시간이었는데 이미 물량 부족으로 살 수 있는 사진의 가짓수는 적었어. 그래서 못 나온 것 빼고 대충 모아다 샀었던 걸로 기억해. 전시장 입구 계단의 데스크에 앉아 티켓을 배부하던 직원이 싸가지가 없었던 것도 기억이 나. 개년.
아무튼.
사진이 쏟아지니 이대로 두는 것도 뭣해서 사진첩에 끼워 넣어야겠다 싶어서 주문했지. 사진첩을.
사진첩을 정리하는 일은 머리로는 5분 안에 끝낼 수 있었지. 하지만 틀렸어. 내 생각은 단단히 틀렸던 거야. 생각보다 귀찮아서 밍기적거리다 두세 시간은 걸렸어. 집중력이 부족해서. 늙으면 다 그런가. 죽어야지. 늙으면 죽는 게 맞지 싶어. 괜히 의료보험에 의존해서 꾸역꾸역 명줄 잡고 억지로 버티는 것보다야. 코로나19의 31번 확진자 대구 신천지 망할 61세 할망구를 봐. 얼마나 추해. 나도 추해.
그래도 사진첩을 정리하니 예뻤어. 좋은 기억은 잘 정돈된 액자 속에서 늘 빛을 내는 것 같아. 내가 가진 예쁜 기억은 정말 너무나 모자라지만. 사진 속 연예인들은 너무 예뻤어. 그냥 그랬다고.
보물상자.
저번 달인가, 요번 달인가. 며칠 간 고전 게임을 했어. 환상서유기 슈퍼보드(?). 국산 게임이야. 게임 속 지도에 숨겨진 보물상자가 1000개가 넘는 걸로도 유명해. IMF 사태로 미완성된 채로 발매되었다는 걸로도 유명하지. 국가적 재난으로 인한 미완성이라고 하니 지금 상황과 비슷한 것 같아. 아니면 말구.
이어서, 그 게임 속 보물상자들 중에 정말로 쓸모가 있는 내용물은 10%도 안 돼. 2%는 될까? 정말로 필요하고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아이템은 몇 없어. 대개가 회복약에다 약초야. 일반적으로 도구점에서 헐값에 허벌나게 판매하는 것들 말이야.
그런데 있지.
그런데 말이야.
참 신기하게도 보물상자가 눈에 띄면 꼭 그 보물상자를 열려고 손가락은 움직인단 말야. 분명 저 속에 보잘 것 없는 도구 아이템이나 들어 있을 텐데 갈 길이나 가는 게 오히려 더 시간 가성비에 이로울 텐데. 플레이어는 개돼지라서 결국 보물상자 쪽으로 발길을 돌려.
저 보물상자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나는 그런 기대심으로 손길을 뻗는 것 같아.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아니고 뭐야. 바보 같아.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보물상자가 눈앞에 있는걸.
그래서 나는 게임 밖의 내 생활 안으로 보물상자를 여러 군데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생각하게 되었다니. 바보 같아. 생각한 거면 생각한 거지 생각하게 되었다는 또 뭐람.
생각했어.
보물상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집 곳곳에 숨겨 두어야지. 시간이라는 도둑이 하나둘 정도 훔쳐 가더라도 내가 슬퍼하지 않게 말야. 내가 보물상자를 까먹고 지내다 어느 날 집 한쪽 구석탱이에서 그 상자를 발견하고 뚜껑을 열었을 때, 소중했던 시절을 기억할 수 있게. 침고로 나는 노트북에 저장해 두었던 10년 어치 디지털 일기 데이터를 잃은 적이 있어. 엉엉.
사람은 좋았던 기억 하나 붙잡고 질질 끌면서 미련스럽게 살아가는 비참한 짐승이니까.
오늘 다 정리한 사진첩을 덮으면서 드는 생각이 이거였어. 생각보다 내가 많이 좋아했었구나. 물론... 아는데,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까지 많이많이 좋아했었구나. 나는 다른 것도 덕질하니까 그냥저냥 보통 수준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많이 좋아했었구나.
깨달으니까 두통이 왔어.
너무 바보 같음에.
내가.
너무 사랑했구나. 지나고 다시는 오지 않을 시절을 말이야.
콘서트가 취소되었어.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되돌아오지도 않지.
너무 아쉬워.
취소 소식을 접했던 낮은, 해의 시간이니까 눈물이 나지는 않았어. 하지만 밤이 깊어지니 난 또 나를 모르겠어. 밤은 나의 시간이잖아.
많이많이 아쉬워 나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을 공유하는 일인데 물거품으로 사그라들어 버렸다는 사실이. 내 인생은 루프물이 아니잖아. 그래서 만나지 못한 시간은 영영 만나지 못한 채로 내 삶 속에서 없던 일로 지워진다는 것이 아쉬웠어. 만나다니. 사실 직접적으로 만나는 일은 아니잖아. 콘서트가. 보러 가는 거지.
신기루는 사라졌어.